권력이라는 말은 통상 다음과 같은 인과적 관계로 이해되고 있다. 에고Ego가 권력에 근거하여 타자Alter로 하여금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특정 행동을 하도록 영향을 미친다
— 한병철, 권력이란 무엇인가
사물이 힘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 힘이 행사되지 않을 수 있으며, 그 힘이 행사되더라도 (특정의 결과로) 실현되지 않을 수 있으며, 그 힘이 특정의 결과로 실현되더라도 우리가 지각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 앤드류 콜리어, 『비판적 실재론』 
실험의 역할은 자연의 어떤 한 기제를 다른 기제들의 효과들로부터 고립시킴으로써 그 기제가 자체의 힘으로 무엇을 하는 가를 알아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 … ) 단 하나의 기제만이 작동하도록 실험을 구성했다면 우리는 폐쇄 체계(closed system)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우리의 우주에서 완전히 폐쇄될 수 있는 체계는 하나도 없지만, 실험 상황에서는 과학의 목표에 충분할 만큼 폐쇄에 접근할 수 있다. 폐쇄 체계의 특징은 주어진 인과적 자극이 항상 동일한 결과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점이다. ( … )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폐쇄가 자연적으로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실험이 필요한 것이다. ( … ) 우리가 만들어내는 매우 특수한 과정인 실험 — 여기서는 일이, 실험실 밖의 개방 체계에서 일이 일어나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일어난다 — 은 어떻게 우리에게 자연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가? 실험실의 결과가 단지 실험 상황에서 일어나는 일만을우리에게 말해준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만일 실험이 자연이라는 개방 체계에서 일들이 어떻게 발생하는가에 대해 전혀 이야기해 주지 않은다면, 실험은 아무런 인식적 가치도 갖지 못할 것이며, 단지 흥미로운 술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 앤드류 콜리어, 『비판적 실재론』

무학(無學) 마초 김어준, 생물학적 완성도를 논하다.

생물학적 완성도에 감탄하면 안되나? 생물학적 완성도에 대한감탄, 성적대상화는 자연스런것이다 여성들이 그런약자의 의식으로 비키니를 성적담론으로만 머무르게하는건 60년대 사고에서 한발짝도 나아가지못하는것임”(김어준, 시사인콘서트)

남성은 모든 젖가슴에 반응한다. 아예 못 봤으면 모를까 이왕 봐버린 것 빛의 속도로 뇌는 호르몬과 전기신호로 발광한다. 그리고 평평한 젖가슴보다 풍만한 젖가슴에 더 잘 반응한다. 물론 개체적 차이에 의해서 평평한 젖가슴에 대한 페티쉬를 가지고 있는 남성도 존재하겠지만 남성은 분명 풍만한 젖가슴을 좋아한다. 근거는 미디어에 넘쳐나는 ‘거유(巨乳)’들이다.  

이것이 과연 학습의 결과인가? 풍만한 젖가슴을 보면서 좋아하는 남성들은 모두 청소년기를 ‘거유’ 여성의 나신 사진이나 동영상과 함께 보낸 결과, 왜곡되고 그릇된 여성상이 이식되고 고착화되어 버린 것인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그러나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매우 대규모의 실험이 진행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또한 본성적 욕망이란 언제나 사회적 규범과 양식들 속에 묻어들어가 있고, 또 분리할 수 없을만큼 얽혀있어서 순수하게 생물학적인 욕구란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다. 그러니 ‘생물학적 완성도’란 사실은 사회적으로 왜곡된 욕망을 생물학의 이름을 빌어 정당화하려는 꼼수 중에 상꼼수라고 평가할 것이다. 더 나아간다면, 청소년기에 주체할 수 없는 성적 호기심과 성욕을 여성을 대상화하는 ‘뽀르노’—이것이야 말로 성적 대상화의 방법론과 실제를 적나라하게 학습시키는 원흉이다—를 통해서 해소해서는 안 되며, 오로지 순수한 자신의 상상을 통해서만,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게 서로의 욕망을 긍정하는 그러한 성교 상황에 대한 상상 혹은 그러한 성교의 실현을 통해서만 해소하고 해결하는 일종의 태도와 그것을 달성할 구체적 훈육 방법을 요구할지도 모르겠다. 좀 더 나아간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십조기가바이트 분량의 어덜트 비디오는 여성을 대상화하는 마초남성(혹은 마초가 아닌척 하면서도 사실은 마초인 남성)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대상화를 당장에 그만두고 이런 마초적이고 저급하고 반페미니즘적인 영상의 제작은 물론 유통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위와 같이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생물학적 완성도에 감탄하면 안되나? 생물학적 완성도에 대한 감탄, 성적대상화는 자연스런 것이다“라는 김어준 씨의 주장은 얼마나 마초적이며 얼마나 반여성적이며 얼마나 시대착오적인가. 어떻게 가슴 크기라는 개체적 차이에 ‘완성도’라는 우생학적 개념을 접합시킬 수 있으며 심지어 그것에 감탄한다는 것인지 그들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을 것이며 뇌리에는 나치즘과 파시즘이 오버랩 될 것이다. 게다가 ‘성적대상화는 자연스런 것’이라니. 이쯤되면 ‘인정사정볼 것 없이’ 무학(無學) 마초의 저급함을 공격해야 한다.  

김어준 씨의 주장에서 생물학적 완성도란 젖가슴의 풍만한 정도이며 성적대상화란 남성이 여성을, 혹은 여성이 남성을 성적 활동의 잠재적 파트너로서 대상화하는 것이다(대상화라는 표현이 걸리지만 이것 따지면 한 세월될 테니 그냥 넘어가자). 김어준 씨가 자칭 ‘무학’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감안할 때, 그의 말은 사실 너무 얌전하다. 좀 더 급진적으로 좀 더 적나라하게 ‘번역’해보자면,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래서 매우 조심스럽긴 하지만, 어쩌면 아래와 같을지도 모르겠으나 역시 확신하기는 어렵다.

“큰 젖가슴에 감탄하면 안 되나? 큰 젖가슴을 보고 감탄하거나, 그 젖가슴을 가진 여성을 섹스 파트너로 상상해보는 건 자연스런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 같이, 이것은 너무나 잘못된 청소년기를 보낸 결과, 그 과정에서 너무나 잘못된 여성상을 갖게 된 결과,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끔직한 일들을 초래할 것인지 자각하지 못한 채 곧바로 무의식 수준으로 내면화해버린, 성, 여성, 남성, 성욕 등 성관련 종합 세트에 대한 잘못된 일반화와 믿음의 결과인 것이다. 어쩌면 무학 마초로서 내뱉을 수 있는 너무나 천연덕스럽고도 장엄한 전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까 그는 ‘젖가슴’을 보고도 못 본척 하고, 꼴리지 않은 척 하는 이 사회의 희한한 ‘엄숙주의’에 도전장을 내밀고, 이제 남성과 여성은 서로를 자유롭게 성적대상화 할 수 있는 ‘꼴릴(수 있는) 자유’ 같은 ‘개 같은’ 자유가 실현되는 그런 세상을 꿈꾸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마초가 바라는 그런 세상이 아니겠는가. 여기서 멈추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는 자신의 입으로는 언급해서도 안되고 언급할 필요도 없었던 ‘성적 담론’이라는 유학자(有學者)들이나 쓰는 말을 입에 올렸고, 심지어 자신을 비판하는 유학자(儒學者)들을 60년대 사고—그럴리는 없겠지만 68혁명을 염두에 둔 것일지도 모르겠다—라고 싸잡아 타임머신을 태워 발라버렸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으니 이제 앞으로 전개될 2라운드에 귀추가 주목된다.

(플라톤의 동굴의 우화에서 동굴바깥으로 나온 죄수가) 동굴 바깥에서 알게 된 진리(에피스테메)는 동굴 안에서 형성된 죄수들의 의견(독사, doxa)을 이길 수 없다.
— 고병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melissacooke:

Detail

“Skull Face”, graphite on paper, 49 x 38”

우주 초기의 짧은 순간에 그 이후에 나타나는 모든 물질과 에너지의 집중을 일으키는 원인을 제공하게 되는 불균일성과 비등방성이 도입되었기 때문에 우리 우주는 흥미로운 일들이 계속 일어나는 재미난 세상이 될 수 있었다. ( 중략 ) 약간 밀도가 높게 된 지역은 인력으로 조금 더 많은 질량을 끌어 모을 수 있었고, 우주가 커지자 밀도가 높은 이런 지역이 은하나 은하단과 같은 커다란 구조로 발전하게 되었다(144)
— 닐 디그래스 타이슨 ・ 도널드 골드스미스, 『오리진』

복수의 윤리

이번 설 연휴 귀향, 상경 길에 계속 트윗을 했다. 평소같으면 그냥 넘겼을 트윗들에 반응을 하다가 몇 가지 생각해 볼 문제들을 얻었다.

첫째, ‘복수의 윤리‘에 대한 문제다. 나는 개인적으로 일반 시민들의 마음 속에 이명박과 그 일당, 그리고 한나라당에 대한 분노가 가득차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10.26 서울 시장 보궐 선거에서 드러났고, 이 분노는 앞으로 총선, 대선까지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분노에 불을 지르는 쪽은 ‘나꼼수’인 것 같고, 이 격한 분노에 대해서 몇몇 논객들은 그 ‘감정적 과도함’에 경고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일부에서 염려하는 감정적 과잉은 거의 본능적인 반응인 것 같기도 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불행의 책임을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내 탓’보다는 ‘남 탓’을 할 때가 많고, 가장 만만한 남이 정치인들이다. 이렇게 볼 때, 기성정치권에 대한 분노에는 어느 정도 책임전가성 태도도 포함되어있다. 내 삶을 아작낸 자들에 대한 분노는 기본적으로 복수(보복)의 감정을 일으킨다. ‘복수’라는 말이 갖는 선정성과 그 이미지의 선명함 — 목을 따고, 피를 처바르는 — 때문에 ‘복수’라는 단어로 사람들의 감정을 움직이기 쉬울 수 있다. 예컨대, 부패한 정권에 대한 시민들의 복수, 빼앗긴 삶을 되찾는 민중의 복수, 아니면 노무현을 죽인 더러운 정권에 대한 복수.

‘분노하고, 복수하라’ 이런 구호에 대해서 다시 지나치게 감정적이라는 걱정을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여기서 복수하라는 말은 목을 따거나 피를 처바르자는 의미가 아니라, 시민들의 분노를 상징적으로 해소하기 위한 일종의 레토릭일 뿐이다. 복수는 적법한 절차를 통해서 이뤄져야 한다. 여기서 복수는 사적이고, 야만적인 그런 복수가 아니다. 사적이고 야만적 복수는 영화 『부러진 화살』에 나온 김 교수 방식의 복수다. 사적인 복수는 사법체계가 시민의 정당한 분노(혹은 스스로 정당하다고 믿는 분노, 후자로 인한 사적인 복수는 공감을 얻지 못한다)를 해결해주지 못할 때 일어난다. 예를 들어, 영화 『도가니』에서 성폭력을 저지른 교사들이 무죄판결을 받을 때, 만약 가족 중 누군가 직접 나서서 그 교사 중 몇 명을 죽였다고 해서 우리는 살인을 저지른 그 가족을 일방적으로 비난할 수 있는가? 만약 그 재판이 명백히 잘못되었다고 판단된다면 그 살인행위에 대해서 공감할지도 모른다. 다행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이 느꼈을 그 억울함은 영화를 통해서 관객들에게 전달되었고, 공분을 일으켰고 재수사가 진행되었으며 가해자들은 뒤늦게 처벌을 받았고 분노는 사그러졌다. 법이 각 개인의 분노를 적절히 관리하지 못할 때, 사적 복수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복수는 나쁜 것이 아니다. 복수는 공정함에 대한 인간의 감각 — 당한 만큼 갚아준다 — 을 유지시켜준다. 근대 국가에서는 이 복수의 권리를 국가가 사법권의 형태로 독점한다. 문제는 국가의 복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사법개혁을 요구 밑바탕에는 사법부의 ‘불공정함’을 도저히 더 이상은 봐줄 수 없다는 시민들의 정서가 깔려있다. 복수를 믿고 맡겼더니 복수를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가해자를 두둔한다. 정상적 인간이라면 이것은 참을 수가 없는 일이다. 

올해는 복수의 해가 되어야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제대로된 복수가 이뤄질 수 있는 시스템을 정비하는 해가 되어야 한다. 감각있는 정치인이라면 이 분노와 복수의 열망을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일단은 나라를 말아먹고 있는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에 대한 복수부터 시작하고, 그 다음에는 권력의 개가 된 사법부에 대한 복수를 할 때다. 

복수를 참는 것이 윤리적인가? 아니면 제대로 복수하는 것이 윤리적인가? 시민적 복수는 언제나 제대로 해야 하는 것 아닐까?

※ 복수라는 주제는 상당히 흥미롭다. 앞으로 긴 호흡으로 생각해 볼만 하다.

공산주의란 우리가 성취해야할 어떤 상태가 아니며, 현실이 형성해가야 할 어떤 이상도 아니다. 현 상태를 지양해나가는 현실의 운동을 우리는 ‘공산주의’라고 부른다. 이 운동의 제반 조건은 지금 실제로 존재하는 전제로부터 생겨난다.
— 칼 마르크스, 『독일이데올로기』
타자를 단지 ‘수단’으로만 취급하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칸트가 말하는 ‘자유의 왕국’이나 ‘목적의 왕국’이 코뮤니즘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하다. 반대로 코뮤니즘은 그러한 도덕적 계기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역사적으로 칸트파 마르크스주의자는 사라져버렸는데, 이러한 취급은 부당하다.
— 가라타니 고진, 『트랜스크리틱』